경계를 넘어서며

대구 미래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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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수많은 경계가 존재한다. 가끔 그 경계를 넘어오면 따가운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언제고 욱신거릴 만큼 아프다. 우리가 마스크를 쓰고 산 지 2년 반이 넘어가는 이 시점에 돌이켜보면 마스크를 쓰지 않았던 시절이 너무나 좋았다는 것을 따갑게 기억하는 것처럼. ‘시대, 대인, 내면’의 경계를 넘어서면 언제고 욱신거릴 만큼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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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통증이 있어야 우리는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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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7년, 6월까지 나에겐 공기 같은 사람이 있었다. 언제나 즐거울 수 있는 마법 같은 사람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타인을 100% 믿을 수 있다고 증명하는 존재. 지금의 나는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과거의 나는 그렇지 않았다. 어리석게도 ‘공기’가 소중한 것을 몰랐다. 그냥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항상 나와 함께할 거라는 무한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사람은 6월을 끝으로 이생을 마감했다. 응급실 앞에서 처절하게 애원하며 신께 빌었던 기도는 매정했다. 그 순간까지만 해도 몰랐다. 그 녀석의 부재는 6개월이 지나고 나서야 아파지기 시작했다. 그 사실을 부정했던 거 같다. 그러나 인지하고 경계를 다시 밟으며, 살아가는 순간 모든 것들이 어색하기만 했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살아있는 것이 그렇게 재미가 없었다. ‘평생 재밌는 일만 하자 우리!’라며 약속했던 나이지만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았다. 재미를 잃고 ‘약자의 편에 서겠다’는 약속만이 의무로 남아 어깨를 짓누르기도 했다. 그의 존재는 전혀 당연하지 않았다. 나에게 너무 소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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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렇게 타인과 나의 경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밟으며 ‘가장 소중한 것은 부재로부터 드러난다는 것을 배웠다.’ 그 뒤로 나에겐 세상에 ‘당연하다’라는 단어는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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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 나는 사람들이 나의 이야기를 많이 읽어주길 바랐다. 어리석게도 사진은 공간의 부분을 찍어놓고 글로 공간을 스포하지 않고 전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소설이라는 것의 작동원리를 빌려, 상상 속의 공간을 느끼게 하고 실제로 가서 그 상상과 비교해보길 바랐다. 그러나, 당시부터 시대가 많이 변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글을 읽지 않았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전혀 글을 읽지 않았다. 그러나 읽어주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힘을 내던 그때. 한순간,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매체가 가지는 장점을 전혀 활용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라는 의문이 내가 스스로 그어 두었던 어떤 경계를 넘어가게 했다. ‘시각적 이미지’로 모든 것을 전달하고 대신 ‘글을 좀 더 자세하게 써야겠다.’ 그리고 그것을 읽게 하기 위해 공간의 이용 정보를 원문 하단에 달기 시작하고 사진의 마지막 장에 ‘메뉴’를 첨부하기 시작했다. 간절히 바랐기에 내면의 선을 뛰어넘어 나는 나만의 콘텐츠 포맷을 만들 수 있었다. 지금에서 돌아보면 이미 포맷은 오래전부터 머릿속에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 공간의 이야기를 읽어주는 사람들이 공간을 가기도 전에 ‘공간을 스포일링 당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스스로 선을 그어 글에 집중하고자 했다. 그렇기에 내면에 그어 둔 경계를 넘어서 행동으로 그 포맷을 완성하기까지는 꽤 많은 고통이 따랐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 내면의 경계를 넘어보며 ‘경계를 경험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험만이 현실을 오롯이 드러낼 것’이라는 문장을 가슴에 품고 살게 되었다.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우리는 이렇게 ‘시대, 대인, 내면’의 경계들을 넘을 때 종종 통증을 겪곤 한다. 그렇게 우리는 통증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는다. 그렇게 나아갈 수 있다.

오늘의 공간은 그 경계들을 경험으로 잘 드러내는 공간이다.

공간은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다. 여러 가지의 덩어리들이 모여 한 군락을 이루는 곳. 그 덩어리 간의 경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기다란 길이라는 시각적인 요소로 경계를 만들기도 컬러 콘크리트와 쥐색 돌멩이들을 바닥에 깔아 그 경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 경계를 신경 쓰지 않고 마구 밟으며 돌아다닌다. 자연물과 인공물의 경계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연공간과 인공의 공간을 넘나들고, 내부와 외부를 걸음에 따라 경험한다. 이곳의 전시장에 들어서면 있는 쌍둥이 정원과 그 전시 동선은 덩어리들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넘나들도록 구성되어있다. 다 보는 것만 1시간 반이 걸릴 정도의 어마어마한 양의 전시. 그리고 그 전시야말로 이 공간을 가장 잘 즐기는 방법임이 틀림없다. 계속해서 덩어리들의 경계를 넘나들며 새로운 생각과 마주하게 그리고 새로운 장면과 마주하게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이 찾는 중심 공간은 타원이다. 이 타원의 가진 의미는 경험이다. 오래전 르네상스 시대 유럽의 도시는 ‘투시법’과 ‘철학’이 발전하며, 공간을 *선험적으로 구성했었다. ‘완벽한 좌우 대칭’이 그것 중 하나이다. 왼쪽을 보면 반대쪽을 가보지 않고도 그곳의 경험을 알 수 있도록 설계했다. 광장의 모양은 ‘정사각형’이거나 ‘완전한 원형’이었다. 이런 방식의 공간 구성은 걸음걸이에 따라 공간의 경험은 똑같아진다.

그러나 그 이후 로코코, 바로크 운동이 일어나며 공간의 구성은 달라진다. 건물의 좌우에 서로 다른 조각상을 배치하고, 광장은 비스듬한 타원형으로 바뀐다. 타원형은 걸음에 따라 타원의 비스듬한 곡률에 따라 계속해서 다른 감상을 제공한다.

그렇게 공간의 중심인 이 타원형 중정은 ‘경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곳’이라는 말을 전하는 듯하다.

결국 공간은 경계를 넘나들며 중요한 점을 경험으로 전해준다. ‘경계를 경험해야 알 수 있다’는 것과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미적으로도 이 공간은 아주 뛰어나다. 기하학적인 형태들이 계속해서 잘 드러나며, 단일 재료가 가지는 장점인 양감을 극대화하고 있다. 기둥들도 벽면에 정직하게 붙은 것이 아니라 45도 회전하며 들어가 좀 더 기하학적 형상으로 눈에 들어온다. 뚫린 타원형의 중정과 소나무 정원과 메인 공간 사이에 놓인 ‘아케이드’의 열주 또한 공간의 리듬을 만들고 기하학적 마스터 피스 속에서 시각적 쾌락을 주기도 한다. 나무의 초록과 콘크리트의 따뜻한 색감 조합은 마치 일러스트에 들어온 감상을 주기도 한다. 한국에는 잘 없는 공간임이 틀림없다.

공간이 주는 경험을 어렵사리 해석하기보다. 역시 이 공간이 전해주는 메시지처럼 이곳을 경험하기 전의 삶과 이곳을 경험한 후의 삶 사이 경계를 밟아 직접 경험해 보길 바라며 공간을 소개한다.

이곳은 경계를 알려준 공간 대구의 ‘미래농원’이다.

위치 _ 대구 북구 호국로 300-22
카페 영업시간 _ 10~21
전시 개관 시간 _ 12~19[18시 입장 마감, 입장료 성인 18,000원, 현장 예매 가능]

주차장 완비

공간이 보여주는 장면들 _ 커피 마시는 곳, 전시 관람하는 곳, 산책을 즐기는 정원

*선험적 _ 경험에 앞서서 인식의 주관적 형식이 인간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대상에 관계되지 않고 대상에 대한 인식이 선천적으로 가능함을 밝히려는 인식론적 태도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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